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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어디인가 - 남의현 교수 기고
작성자 : 강대신문 학술부
작성일 : 2016-11-27 13:17:24
조회 :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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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년월일 : 제1247호 2016년 11월 28일
발행일 : 2016-11-28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어디인가?

 

남의현 교수(사학과)

 

장수왕이 427년 천도한 평양성(平壤城)은 어디에?

  필자는 명·청시대 만주사를 연구하고 있다. 대부분 연구실에 있는 책들은 명청시대 만주에 관련된 책들이다. 명청시대 만주의 역사를 공부하던 중 필자는 한국 고대 국가 수도의 위치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러한 쟁점 중의 하나가 장수왕이 427년에 천도한 평양성의 위치일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명·청시대 사료들 속에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에 천도한 평양성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록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427년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을 현재 북한의 평양시으로 알고 있다. 북한 역시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을 오늘날의 평양시로 당연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사료에 근거한 것일까. 역사적 기록 속에도 평양성을 북한 평양으로 기록한 것이 있을까. 필자는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명나라 이전 고대 사서들에 나오는 기록들을 통해 평양성의 위치를 추적해 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재의 북한 평양(平壤)이 언제부터 평양이라고 불렀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며, 빨라야 고려후기나 조선시대인 것으로 보인다. 사료의 겸토 과정에서 북한에서 나오는 고구려 유물들과 후대 平壤이라는 지명 때문에 고대 사료에 나오는 평양성이나 평양을 모두 북한 평양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따라서『수서』나 『구당서』,『신당서』 같은 사료에 나오는 평양성을 북한 평양으로 추정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실과 상황들이  맞지 않는다.  

  명이전 사료 중에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을 북한의 평양으로 기록한 사료는 하나도 없다. 명나라 이전 모든 사서들은 그냥 평양성 또는 오늘날 요양으로 기록하고 있다. 과연 그렇다면 사료의 기록대로 오늘날의 遼寜省 遼陽市는 고대 국가의 수도 평양성이 축조될 만한 지리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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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遼河, 랴오허)는 바다와 같이 넓은 강(遼海)

  고대 국가 首都의 규모를 찾는 것은 강의 크기와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 체제는 수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수도는 군사적 방어, 상업의 촉진, 대외진출 등을 위해 가장 활용도가 높은 강을 중심으로 수도를 정하는 경우가 많다. 세계 4대 문명이 모두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만주에서 일어난 많은 국가들, 예를 들면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금나라, 청나라 등은 요하 같은 만주 지역의 큰 강들을 차지하면서 팽창할 수 있었던 국가들이다.

  만주에서 가장 큰 강 요하는 ‘遼海’,‘바다와 같이 큰 요하’라고도 불린다. 요하는 만주 평원을 동서로 가르면서 요동과 요서를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요하 유역 좌우로 요양(遼陽), 심양(瀋陽), 신민(新民), 개원(開原), 철령(鐵嶺) 같은 크고 작은 수많은 도시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수많은 도시를 잉태한 요하는 사료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遼河는 동요하와 서요하 두 물줄기가 합쳐지면서 거대한 강이 되어 발해만으로 흘러간다. 요하는 1930년대까지도 민선(民船) 3,000여 척이 운항할 정도였다. 요하는 비가 오면 강폭이 10리가 되어‘요해(遼海)’ 곧 ‘바다와 같은 넓은 요하’로 불린다. 나아가 요하 서쪽에는 강을 따라 남북으로 遼澤이라는 천연 늪지가 길게 형성되어 요하 서쪽에서 요하 동쪽으로 건너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 때문에 요하는 하늘이 내려준 요새 곧 ‘천참(天塹)’이라고 사료들은 기록하고 있다.

1930년대 까지 요하의 본류 연안에만 배가 정박할 수 있는 부두가 총 50여 곳이나 되었다. 러·일전쟁 이전에 러시아 인의 보고에 따르면 선박이 4만여 척이 왕래하고 있었다. 요하 하류에 해당하는 발해만의 최대항구 영구(營口, 잉코우)항에서 1,200리까지 요하를 거슬러 배가 자유롭게 항해할 정도로 요하의 수로는 편리하고 그만큼 요동의 상업이 번성하시키는 원동력이였다.

요하(遼河)는 또한 거류하(巨流河), 구려하(句驪河)라고도 불렀다. 구려하는 고려하라는 뜻이다. 한 때 고구려가 요하 유역을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강 이름도 구려하가 되었을 것이다.

요하 유역의 요양은 만주 평야를 동서로 가르며 요하 유역에 위치하여 국가의 수도가 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첩첩산중 산골짜기에 해당하는 압록강 유역 국내성 집안에서 힘을 모아 강력하게 팽창하던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427년 이러한 요하와 사통팔달의 만주 벌판을 포기하고 지금의 북한 평양으로 갔던 것일까.

 

遼陽, 사료들이 말하고 있는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성

  사료들은 한결같이 현재 요하 동쪽에 인접한 요령성 요양시를 평양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선 중국 정사에 해당하는 <<元史>> 地理志의 동령로(東寜路) 조를 인용해 보자.  

 

東寧路는 원래 고구려 平壤城으로 長安城이라고도 한다. 漢나라가 朝鮮(즉 고조선을 말함)을 멸하고 낙랑, 현도군을 두었는데 이곳은 낙랑의 땅이다. 진나라 의희 연간 후 왕 고련(高璉, 곧 장수왕)이 처음으로 이곳 平壤城에 거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平壤城을 공격하자 고구려가 압록강 동쪽 1000여 리로 옮겨갔는데, 그 곳은 옛 평양이 아니다

  이 기록에 나타나는 동령로는 원(元)나라의 행정구역이다. 원나라의 행정단위는 行省-路-府-州-縣이다. 몽골군대가 고려를 정복한 이후 고려 최탄 등이 西京(곧 평양) 등 60여 개 성을 들어 몽고에 투항하자 원나라가 1270년 투항한 60여개 성을 묶어 東寧府로 삼아 원나라의 행정구역으로 삼았다. 이 동령부는 1290년 다시 동령로로 승격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사료들은 동령이 곧 평양이며 평양이 서경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동령로는 원나라가 만주로 진출하며 설치한 요양행성의 행정단위 이므로 북한의 평양이 동령로에 포함될 수 없다. 북한 지역은 정동행성의 범위이지 요양행성의 범위에는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최탄이 투항한 서경 등 60여 성은 애초부터 한반도가 아니가 요양(평양, 서경)과 그 부근의 60여 성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고려사』등에 나오는 동령부 기사를 분석해 보면 ‘東寜’이라고 했을 뿐 동령의 지리적인 위치를 북한 평양으로 기록한 것은 단 한건도 없다.  

  이『원사』지리지의 기록을 분석해 보면 당나라가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자 고구려가 압록강 동쪽 천여리 밖 평양으로 갔는데  그 곳은 옛 평양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원사』는 명초기에 기록된 것이므로 명 초기에는 당시 북한의 평양이 오늘날처럼 평양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압록강 동쪽 천여 리 떨어진 현재의 북한 평양은 옛 평양이 아니며 옛  평양은 동령로에 있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예 고구려 수도 평양과 북한 평양이 2개 있음을 명나라 사람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1586년에 明나라의 왕기(王圻)가 편찬한『흠정속문헌통고(欽定續文獻通考)』에는‘동령은 바로 요양’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명대  지리지『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요동도사(遼東都司)조 고적부분에도 평양성을 기록하고 있다. 요동도사는 명나라가 몽골세력을 축출하고 만주에 세운 명나라의 군사기구로 그 관할범위는 압록강에 미칠 수 없었다. 따라서 요동도사 고적 부분에 기록된 평양성은 요동도사 관할지역의 평양성이지 요양에서 1천여 리 떨어진 북한의 평양성이 될 수 없다.『대명일통지』는 명나라의 지리지로 한반도의 지명이 기록될 이유가 없다. 『대명일통지』에 나오는 평양성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자.

 

平壤城- 일명 왕검성으로 곧 기자의 옛나라이다. 성 바깥에는 기자의 묘가 있다. 한나라 때는 낙랑군의 치소였으며 진(晉) 의희(義熙) 연간 후에 그 왕 高璉(장수왕)이  처음으로 이 성에 거하였다. 후에 이 평양성을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원나라 때 동령로가 되었다.

  이 기록을 보면 평양성이 왕검성이며 기자 조서의 수도였으며 서경이며 동령로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시 동령로를 언급하고 있으며 북한의 평양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요양을 직접 보고 고구려의 평양성임을 기록한 사료도 있다.

  조선시대 최부가 남긴『표해록(漂海錄)』은 더욱 요양이 고구려의 평양성임을 알게 해준다. 최부는 제주도에서 육지로 건너오다가 중국 해안에 표류하여 우여 곡절 끝에 만주를 통해 조선으로 귀국한다. 귀국하는 전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그 사료가 바로 『표해록』이다. 이『표해록』의 기록 중 요양에 머무르면서 남긴 기록을 살펴보자.

  

  『표해록』1488년 5월 24일 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遼陽은 원래 고구려의 도읍인데 중국에 빼앗긴지 천여 년이나 되었고, 우리 고구려의 풍속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아서 고려사(高麗祠)를 세워 근본으로 삼고 공경하게 제사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니 근본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漂海錄』1488년 5월 28일 조에도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요동(요양)은 옛날 우리 고구려의 도읍이었는데 당 고종에게 멸망을 당하여 중원에 예속되었습니다. 五代 시대에 발해 대씨(대조영)의 차지가 되었으나 후에 또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에게 병탄되었습니다.…또한 성 동쪽에는 동령위성(東寧衛城)을 별도로 쌓았는데 首山, 千山, 木場山, 駱駝山, 太子山, 杏花山 등 여러 산들이 성 서쪽, 남쪽, 동쪽을 빙 둘러치고 있었으며 그 북쪽은 평평하고 특 트여서 끝이 없는 벌판이었습니다.

  이 기록은 당시 최부가 요양에 머무르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이라 가장 정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동령위성은 원대의 동령로에 살던 많은 고려인들로 구성된 위(衛)의 城이다. 위(衛)는 명대 군사단위로 요동을 방어하기 위해 고려인들로 동령위를 만들었던 것이며 그 성이 요양에 있었던 것이다.    

  명대 지리지『황여고(皇輿考)』역시 만주에 고구려의 왕성(王城)․국성(國城)․평양성(平壤城)의 3경이 만주에 있다고 적고 있다.

19세기에 기록된 사행록인 『연원직지(燕轅直指)』역시 평양성의 위치를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은 1832년에서 1833년 사이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온 김경선(金景善)의 사행기록이다. 제1권 출강록(出疆錄) 임진년(1832) 11월 24일조를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단지 지금의 평양만 알아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을 했다,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평양에 기자의 묘가 있다고 말하면 믿으나, 요동에 평양이 있었다고 하면 꾸짖으며 괴이하게 생각한다. 이는 요동이 본래 조선의 옛 땅으로서, 숙신(肅愼), 예맥(穢貊), 동이의 여러 종족이 모두 위만조선(衛滿朝鮮)에 복속한 것을 알지 못하고, 또한 오랄(烏剌), 영고탑(寧古塔), 후춘(後春) 등의 넓은 만주 땅이 본래 고구려의 옛 강토인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 후세 사람들이 땅의 경계를 자세히 알지 못하여 망녕되이 한사군(漢四郡)의 땅을 모두 압록강 안에 국한하여, 사실에 억지로 합하여 구구하게 나누어 배치하였다. 그리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아 더러는 압록강을 패수라하고 더러는 청천강을 패수라고 하고, 더러는 대동강을 패수라고 하니 이것은 조선의 옛 강토가 싸우지 않고도 저절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까닭은 무엇일까? 평양을 한 곳에다 고정시키고 패수는 앞뒤로 당겼다 물렸다 하여 항상 사적을 붙이는 까닭이다.”

 

역사연구의 지평을 한반도에서 만주로!

  위에서 살펴 본 사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사료에서예외 없이 만주의 요양시로 기록하고 있다. 사료들의 공통점은 평양성은 서경이며 동령이며 요양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요양을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으로 인식하며 북한의 평양과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공민왕이 고려후기 공략한 동령부가 압록강 북쪽에 있었음을 감안하면 동령부는 북한 평양지역이 아니라 요양 등이 그 중심이었으며, 요양 부근의 60여 개의 성을 회복하고자한 고토회복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국가 이름을 고구려와 동일한 이름인 고려로 국호로 하였다. 고려의 건국에 대해 중국 사료들은 태조 왕건의 고려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계승해 건국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태조 왕건은 건국직후 제 1의 수도를 개경으로, 제 2의 수도를 서경으로 삼았다. 우리는 제 2의 수도 서경을 지금의 북한 평양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 고려 초기 지금의 북한 평양이  평양 혹은 서경이라고 불렸던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고려 초기의 西京 곧 평양은 요성(遼城) 혹은 웅도(雄都)로 불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역시 요양임을 알수 있다. 북한에는 ‘요성’이라는 지명이 없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고구려를 무너트리기 위해 수차례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수서』나 『신당서』 『구당서』를 읽어보면 수당의 군사가 공격하려한 평양성이 북한에 위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전투 상황과 군대의 이동 루트를 보면 산해관을 넘어 요하를 건너편 평양성을 함락하려는 부대, 그리고 산동에서 출발해 발해를 건너 요동반도에 상륙해서 평양성 곧 요양 평양성을 함락하려는 부대로 나누어진다.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구당서』나 『신당서』 역시 평양성의 위치를 요동에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오늘날의 요양이나 그 부근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한중관계가 수교되어 중국의 출입이 자유롭고, 『사고전서』를 비롯한 중국의 수많은 자료들이 데이터베이스가 되어 자료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다. 한중수교 이전에는 사료나 자료의 접근이 쉽지 않아 고고학적 자료에 의거하여 고구려 평양성을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고고학적 해석은 문헌의 기록과 함께 이루어 졌을 때 그 해석이 더 정확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사료에 대한 치밀한 고증과 고고학적 유물을 같이 해석해야 하는 시대에 와있다. 기존의 선입관을 버리고 이런 기록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평양성의 위치를 찾는 일은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한국사의 지평을 북방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좋은 전환점이 될 것으로 믿는다.